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필리피카이]] ==== 점차 위세를 더해가는 안토니우스의 행보에 위협을 느낀 키케로는 로마를 떠나 그의 집정관 재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들이 유학 중이던 아테네에 머무르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역풍에 의해 실패하고, 그런 와중 로마를 위해서는 카이사르파 전체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말해 카이사르 사후 키케로의 정치적 목표는 카이사르 이전 시대로의 회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군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접촉하고, 이전부터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심을 내비치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응해 이유는 다를지언정 안토니우스의 타도를 원하던 두 사람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안토니우스에게 맞설 군사력을 확보한 키케로는 자신의 정치력과 언변을 총동원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속내를 감춘 채, 일단 상황을 독재정을 꿈꾸는 국가의 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몰아가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청하며 그를 "저 검투사의 육체에 두뇌라고는 없는 이"로 칭하는 등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언사를 사용해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그가 안토니우스에게 가한 인신공격은 그의 명성과 함께 여전히 회자된다.[* 예컨대 키케로의 혹평에 의해 안토니우스는 정치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검투사 같은 놈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정치 감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라는 두 인물이 워낙 만렙 먼치킨이었던 것일 뿐.~~ --유언장을 보면 딱히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아테네의 연설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탄핵한 연설을 따라 '필리피카이(필리포스 탄핵)'라고 명명된[* 즉 제목만으로도 안토니우스가 필리포스와 같은 독재자임을 의미하려 한 것이다.] 이 연설문은 카틸리나 탄핵에 버금가는 명문장이라고는 하나, 정작 그 말을 전해 들은 안토니우스의 심정은 키케로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을 것이다.[* 참고로 필리피카이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대두 이후 정세가 악화되자 모종의 대응안을 실행하기 위해 로마를 떠난 이후 작성되고 발표된 연설문이다. 즉, 일종의 빈집털이였던 셈이다.] 또한 키케로는 연설 때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를 인신공격 소재로 삼기도 했다. 풀비아의 전남편 클로디우스가 암살당한 것을 이용해 "[[풀비아]]를 아내로 맞이한 남자는 클로디우스처럼 비명횡사한다"는 패드립성 어그로까지 끈 것이다. 참고로 필리피카이는 '''14번에 걸쳐''' 나온 연설이다. 그리고 마침내, 키케로는 과거 자신을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군림하게 해준 뛰어난 언변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위태로운 균형상태를 완전히 깨뜨리고 원로원 내부의 분위기를 장악해 자기 뜻에 따르게 하는 데 성공,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 타도라는 명분과 새로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보상을 미끼로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인사들과 병력을 얼마간 규합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 공작이 어찌나 절묘하고 그럴듯했는지 먼 히스파니아 총독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같은 카이사르파에 속했던 인사들마저 키케로에게 공화정 수호의 기치에 동참하길 원한다는 의사를 전해왔고, 내심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꾸고 있던 키케로는 이러한 정황에 고무된다. 마침내 안토니우스에게 부여된 집정관으로서의 권한이 만료된 기원전 43년 1월, 이전까지 거듭 행해진 키케로의 연설의 영향으로 안토니우스를 적대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 원로원은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의 주도하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전직 법무관급 권한을 부여하고 휘하 장병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등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나간다. 이때 키케로는 주전파의 대표로서 온건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보증인을 자처'''하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무렵 키케로는 그전까지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냈던 불신의 시선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의 첫 번째 로마 진군시 그를 치기어린 애송이로 취급하며 지지 연설 요청을 묵살했다.] 자신이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인 옥타비아누스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키케로가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쥔 것은 아니었으며 여러 이유에서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강경책을 고수하는 키케로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의원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당년도 집정관이자 본래 카이사르파 인사였던 히르티우스와 판사도 이런저런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도 위험인물인 안토니우스 타도라는 목적하에 키케로와 협력을 했지, 일방적으로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또한 이 무렵 키케로는 카시우스에게 시리아 속주 총독직을 넘겨주기 위해 노력중이었는데, 본래 시리아가 판사의 부임 예정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즈음 판사가 키케로의 주장을 경청하고자 했을 가능성은 매우 작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결과적으로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의 역량을 과소평가함과 동시에 본인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 내전]]에서 당년도 집정관 히르티우스 및 판사와 연합해 안토니우스를 패퇴시킨 뒤, 집정관인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사망 이후 군대를 장악하고 키케로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부터 자신만의 속셈을 지니고 키케로에게 접근했으며, 그가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 이유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이 키케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분쟁을 극대화해 궁극적으로 그들의 절멸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를 이용해 안토니우스의 위세에 타격을 가하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 입지를 다진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또 사람이라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락한 후 여러 차례 전성기의 영광을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간 행보를 통해 키케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명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와의 연합에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정치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보다 고단수였다. 미래의 아우구스투스가 키케로에게 내린 평가는 제법 의미심장하다.[* 아우구스투스 말년에 손자들이 키케로의 저작을 읽고 있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들켰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그 저작물을 조금 읽다가 손자들에게 건네주면서 "학식과 교양이 뛰어난 인물이었지. 그리고 애국자이기도 했단다" 라고 평을 했다고][* 이 일화는 장년기에 이른 아우구스투스가 회상하기에 키케로를 학식이 뛰어난 교양인이자 애국자로는 보았지만 자신의 적수로는 여기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더욱이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와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꾀하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쓸모가 다하면 새로운 카이사르도 제거할 거다"란 취지의 말을 입에 담는 어찌 보면 그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당연하지만 이 말은 새로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무티나 전역이 자신의 바람처럼 안토니우스의 파멸로 귀결된 것처럼 보이자 지나치게 일찍 승리를 확신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무티나 근교에 주둔중인 전 군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겐 그의 휘하에 들어가라고 명하는[* 바꿔 말해,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군 지휘권을 박탈하고] 한편 옥타비아누스를 배제한 채 군단병과 접촉 및 소통하는 위원회를 조성하는 등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옥타비아누스도 제거한다는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성급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미 군대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의 지시를 거부하고 약속된 보상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구카이사르 군단 출신 장병들은 가뜩이나 전우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을 기꺼워하지 않았는데 무티나 전투 이후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은 임의로 병사들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절반으로 삭감하려 했기 때문이다. ~~두 배를 줘도 모자랐을 상황에서 말이다.~~[*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자면, 당시 로마 국고에는 병사들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지급하기에 충분할만한 자금이 없었다. 적어도 키케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당연하지만 이 상황에서 키케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대에 지급할 돈을 마련했어야 했다. 당장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시칠리아 및 지중해 장악으로 로마에 들어오던 밀이 끊겼을 때 군대에 줄 봉급을 마련하기 위해 에트루리아의 도시의 토지를 탈탈 털어서 자기 군대에게 지급했을 정도다. 물론 잘 한 짓은 아니지만 적어도 허둥대지 않고 우선 순위를 정해 행동한 점만큼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 상기한 주장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고례의 법률에 근거해 기사 계급의 이익과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을 옹호해 온 본인의 행보에 어긋나는 유산 계급에 대한 전쟁세 징수에 나섰다는 사실은 그 무렵 키케로가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로마를 위한 정의로운 일(키케로가 사용했을 법한 표현으로는 선한 행위)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키케로의 시도는 재산상의 요건에 근거해 납세자로 분류된 유산 계급 소속 로마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혹은 관련 사안에 대한 냉담함으로 인해 실패한다. 그리고 키케로가 일생토록 주창한 정치 철학이 하나의 통치 계급으로서 조화를 이룬 원로원 계급과 기사 계급의 질서 있는 통치 더 나아가 전이탈리아 유산 계급의 질서 있는 통치였음을 고려하면 언급한 일은 그 원인의 무게중심을 유산계급의 애국심 부족 및 결여(혹은 정치의식 부족 및 결여) 또는 키케로의 개인적 정의관에 기반한 이상주의에 둘 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념적인 측면에서 키케로에게 가해진 일생의 타격이었을 가능성이 꽤 크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의 반응에 적절히 대응해 키케로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의 최종 목표가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도록 한다. 이 무렵 옥타비아누스의 목표는 누구나 인정할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입장과 그 무렵 제국 동부에 웅거하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세력을 고려하면 이미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과 척을 지기 시작한 그에게 카이사르파 세력과의 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까웠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원거리에 머물고 있어 사태의 추이에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 채 분열돼있던 서방 속주의 카이사르파 세력을 단결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 무렵 작성된 글에 의하면,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키케로의 진의를 파악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카이사르 사후 지속해서 분열돼있던 카이사르파는 고위인사부터 하급장병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단결, 원로원파 인사인 데키무스 브루투스 휘하의 장병들마저 지휘관을 버리고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후 악화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패주하는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재결집한 카이사르파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됐고, 결국 휘하 장병들에게 거부당하고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자리 잡은 마케도니아 속주로 도주를 감행하나 도중에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한 갈리아 부족장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훗날 제2차 삼두정의 일원이 되는 레피두스도 상황이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보인 시점엔 사태 수습을 위해 안토니우스와의 중재역을 자청하는 등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럭저럭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다만 두 사람의 관계는 키케로가 레피두스의 제안에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임으로써 진즉 어긋난 상태였다.] 카이사르파간의 분쟁을 원치 않는 군대의 요구와 점차 명확해지는 키케로의 목적에 따라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키케로를 적대하는 등 자신이 카이사르파 인사임을 분명히 한다. * 이 지점에서 잠깐 사태의 추이를 돌이켜보자면, 이후 전개를 고려할 때 동부로 향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그들의 행보에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부여하고자 노력한 시점부터 키케로의 구상은 대강 '히르티우스, 옥타비아누스, 판사가 이끄는 군대로 무티나에서 해방자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세력을 압박 중인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한다. -> 사태가 일단락되면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명목상의 지위만을 부여한 채 휘하 군단을 데키무스 브루투스 예하로 전속하고, 그렇게 보강된 군세로 판사와 히르티우스를 압박하는 한편 타협을 모색한다. ->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동방에서 모집한 군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에 상륙하면 그 사실을 발판으로 압박을 심화, 자신이 보기에 이로운 형태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군사력으로 제압한다'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염두에 둘 점 중 하나는 결정적 수 혹은 믿을 수 있는 군사력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군대가 이탈리아에 상륙하기 전까지 (구상의 난도를 높이거나 구상을 아예 헝클어뜨릴 수 있는) 서방 속주의 구카이사르파 총독인 플란쿠스, 레피두스, 폴리오가 군대와 함께 안토니우스 또는 판사와 히르티우스의 세력에 합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 터다. 그런데 정작 실제 전개는 '모호하기는 하나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레피두스와의 사이가 틀어지다. -> 키케로가 무티나에서의 승전 이후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 휘하에서 전사한 구카이사르 군단 출신 장병을 조롱한 사실을 접한 폴리오가 격앙하다. -> 그 폴리오가 플란쿠스-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군대와 대치중인 안토니우스-레피두스 세력에 합류한 뒤 플란쿠스를 설득해 서방 속주의 카이사르파가 재규합하다. ->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탈출을 시도하나 처형되다'. 일어난 일만 놓고 보면 키케로의 구상에서 서방 속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대강이나마 가늠하기가 무척 어렵다.[* 사실 키케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짐작하는데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다. 키케로는 원래 성격이 경솔하고 이론가로서는 나름 성과가 있지만 실제 정치가로서는 그리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단견적이다. 거기다 매우 성격이 급하고 격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생각해보면 일단 계획 자체가 있었을 지는 몰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조삼모사하는 일이 많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오히려 옥타비아누스가 나이는 젊어도 필요할 때마다 매우 냉철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장 활용 가능한 군사력이 사라져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린 키케로는 그 무렵 로마를 떠나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머물며 군세를 확충하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할 것을 거듭 촉구하나, 이전까지 군사적 충돌을 염두에 두고 옥타비아누스와의 협력을 꾀하는 키케로를 만류하는 등 가급적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바랐으며[*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분쟁을 극대화해 카이사르파 전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면, 브루투스는 되도록 로마인의 피를 흘리지 않고 쌍방의 타협 등을 이끌어내는 형태로 평화롭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라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카이사르를 아무 비전도 없이 암살한 브루투스가 할 말은 아니며 실제로는 불안한 상황인 브루투스 입장에서는 제발 내쪽으로 불똥튀게 하지 마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키케로가 하는 짓을 꺼림칙하게 여긴 것도 사실상 그렇잖아도 위험한 상황에서 키케로가 불을 더 활활 태우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을 테니 당연한 것이고.] 상황이 바뀐 현재 자신이 이끄는 군세만으론 이탈리아로 진군해 재결집하기 시작한 카이사르파의 군세에 맞서는 일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브루투스는 키케로의 요청에 따르는 대신 서서히 가시화되는 카이사르파와의 군사 충돌에 대비해 시리아 속주를 장악하고 군세를 불리고 있던 카시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동진한다.[* 카시우스는 과거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대패한 이후 역으로 쳐들어온 파르티아의 공세에 맞서 시리아 속주를 지켜낸 일로 해당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로마의 키케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타협안과 회유안을 제시하나 옥타비아누스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후 로마에 입성해 정식으로 집정관 직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주축으로 한 카이사르파 세력과 접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카이사르파 간의 분쟁 종식을 원하는 군심을 달래고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제국 동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브루투스 및 카시우스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안토니우스와 화해한다. 정국을 장악한 제2차 삼두는 살생부를 작성하는 한편 그들이 이 관계를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할 목적에서 각자 가까운 이를 한 명씩 희생제물로 내놓기로 한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패한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데에 동의한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레피두스는 그들을 적대하며 키케로를 지지한 형 파울루스를,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담은 한때의 아버지 키케로를 희생제물로 지명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꿨던 키케로는 셋 모두 더 나아가 카이사르파 전체의 공적이라 할만했는데, 특히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게 크게 분노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반드시 꼭 죽여야한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에 레피두스가 동의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묵인하에[*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틀 동안은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의 살해에 반대하며 막아섰으나, 마지막 날이 되자 양보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지명한 세 명의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는다. 안토니우스의 희생제물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누이이자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안토니아의 탄원에 힘입어 사면받았고, 레피두스의 희생제물인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레피두스의 은근한 지원과 방조에 힘입어 로마에서 탈출해 브루투스의 세력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나 필리피에서 재차 카이사르파에게 패한 후 사면을 허락받고 [[밀레투스]]에 칩거한다.[* 성격은 다르지만 지명된 이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제2차 삼두정이 작성한 살생부의 별난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이 살생부를 작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적 숙청보단 군자금 확보 쪽에 가까웠다. 따라서 군심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형이 필요했던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인물이 아닌 이상 재물이 확보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듯하며, 적절한 목숨값을 내놓으면 사면을 사는 일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2차 삼두정이 작성한 살생부는,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인사 2천여 명의 처형이 아닌 추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